국내 고급 주거시장의 프리미엄 기준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한때 '어느 입지에, 얼마짜리 마감재로 지었느냐'가 하이엔드 아파트를 가르는 잣대였다면, 이제는 '단지 안에서 어떤 일상을 누릴 수 있느냐'가 새로운 척도로 자리를 잡았다. 주거 공간이 자산의 개념을 넘어 시간과 경험을 관리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이엔드 주거의 진화는 세 단계로 요약된다. 1세대는 2000년대 초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초고층 주상복합이다. 층수와 조망, 24시간 보안이 고급 주거의 상징이었다. 2세대는 2010년대 성수 갤러리아 포레, 한남 더힐 등에서 확립된 '수입 마감재·특화 설계' 경쟁이다. 이 시기 DL이앤씨 '아크로', 현대건설 '디에이치', 롯데건설 '르엘' 등 건설사별 하이엔드 서브브랜드가 정립되면서, 같은 회사 아파트라도 브랜드에 따라 청약 경쟁률과 시세가 뚜렷이 갈리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 3세대 흐름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3세대 하이엔드의 핵심은 '단지 완결형 라이프'다. 시설의 유무보다 운영 방식이 중요해졌다. 수영장과 사우나, 북카페 같은 커뮤니티 시설이 기본값이 된 지금, 경쟁력은 그 시설 안에서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가 운영되느냐로 옮겨갔다. 올 하반기 입주한 현대건설의 '디에이치 방배'는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연계 강좌, 서울옥션블루 도슨트, 수면 관리 솔루션, 맞춤형 운동 플랫폼 등을 전용 앱으로 묶어 제공하는 '운영형 하이엔드'를 지향한다. 삼성물산의 '반포 래미안 트리니원'은 테슬라 FSD 기반 자율주행 차량 호출·제어 기술을 지하주차장 전 동에 국내 최초로 적용하고, 디지털 홈플랫폼과 인테리어 시뮬레이션 서비스를 결합했다.
이처럼 '시설 경쟁'이 '운영 콘텐츠 경쟁'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구조적 시장 변화가 있다. 교통망 확충으로 입지만으로 차별화하기 어려워졌고, 고급 마감재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자재만으로는 설득력이 줄었다. 시간과 편의성을 중시하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업계에서는 고급 주거의 경쟁력이 '공간을 얼마나 비싸게 만드느냐'에서 '입주자의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로 이동했다고 본다.
규모 전략도 변했다. 과거 고급 주거가 소수 가구의 희소성과 프라이버시를 강조했다면, 최근엔 수백~수천 가구 규모의 대단지에 최상급 설계·마감과 호텔식 서비스를 결합하는 이른바 '매시브 하이엔드(Massive High-end)'가 새로운 표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가구 수가 많을수록 대규모 조경과 커뮤니티를 확보할 수 있고, 호텔식 서비스의 운영비도 여러 가구가 나눠 부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더파크사이드 서울'이 아파트·오피스텔 합산 1,000가구 이상 규모로 로즈우드 호텔 운영 커뮤니티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흐름은 서울 강남권 재건축 사업은 물론, 문을 닫은 대형마트·백화점 부지 개발로도 확산 중이다. 부산 수영구 남천동 옛 메가마트 자리에도 835가구 규모의 하이엔드 단지 '써밋 리미티드 남천'이 들어선다.
수도권 신도시로의 확산도 가속되고 있다. 경기 화성시 동탄에서는 KB부동산신탁이 시행하고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아크메르 동탄'이 오는 10월 분양에 나선다. 지하 7층~지상 최고 49층, 7개 동, 총 1,808가구 규모의 이 단지는 약 37만㎡의 동탄센트럴파크와 약 71만㎡의 반석산근린공원을 마주한 입지에 유럽 정상급 마감재와 대규모 커뮤니티를 결합했다. 이탈리아 주방가구 브랜드 쿠치네루베, 120년 전통의 독일 수전 브랜드 한스그로헤 등이 전 세대에 적용되고, 천장고를 일반 아파트보다 20cm 높은 2.5m로 설계하는 등 최상위 평형 수준의 사양을 전 세대로 확장하는 '펜트 스탠다드(Pent+Standard)' 콘셉트를 내세웠다.
다만 이 트렌드에는 그림자도 있다. 커뮤니티 시설과 운영 서비스가 늘수록 관리비 부담이 커지는 구조적 문제다. 전국 아파트 평균 관리비는 2021년 ㎡당 2,442원에서 2026년 1~2월 평균 3,371원으로 4년여 만에 38% 이상 올랐다. 실제로 서울의 한 하이엔드 단지에서는 외부 식음 서비스가 이용률 저조와 적자를 이유로 추가 요금을 요구하자 입주민 과반수의 반대로 1년 만에 재계약이 불발된 사례도 나왔다. 업계에서는 화려한 시설 목록보다 그 서비스를 5년, 10년 뒤에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가가 앞으로 하이엔드 주거의 진짜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