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기판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가운데, 삼성전기가 세종사업장에 단일 제품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인 4조2700억원 투자를 결정하며 세종을 첨단 산업 거점으로 키우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같은 시기 3조원대 스마트시티 조성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세종의 산업·주거 지형이 동시에 재편되는 국면을 맞았다.
삼성전기가 이번 대규모 증설에 나선 배경에는 AI 인프라 투자 급증이 있다.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함께 탑재하는 멀티칩 패키지가 AI 가속기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의 수요가 가파르게 늘었다. 고사양 FC-BGA는 대면적 기판의 휨을 제어하면서 미세회로를 구현해야 하는 기술 난도가 높아 양산 가능한 업체가 제한적인 탓에 공급 병목이 심화됐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주주총회에서 "서버·데이터센터용 FC-BGA 수요가 현재 생산능력보다 50% 이상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기는 지난 9월 이사회를 열어 세종사업장 FC-BGA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4조2700억원 규모의 시설투자를 확정했다. 투자 기간은 올해 9월부터 2028년 5월까지이며, 신규 라인 양산은 2028년 9월로 예정돼 있다. 이는 단일 제품 기준 삼성전기 역대 최대 규모다. 앞서 지난 7월에는 2040년까지 세종사업장에 약 8조원을 투자하는 중장기 계획을 발표한 바 있어, 이번 투자는 그 첫 대규모 실행 단계로 해석된다. 삼성전기는 베트남 법인에도 FC-BGA 공장 증설을 위해 2조5100억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해, 세종·베트남 양 거점에 걸친 총 투자액은 약 6조7000억원에 달한다.
장덕현 사장은 "AI와 고성능 컴퓨팅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고부가 반도체 기판은 반도체 성능과 공급망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차별화된 기판 기술력과 안정적인 공급 역량을 바탕으로 AI·서버·전장 등 고성장 시장에서 FC-BGA 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산기지 투자와 함께 도시 차원의 미래 인프라 구축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세종시 합강동 5-1생활권에 조성 중인 스마트시티 국가시범도시가 그 중심이다. 2018년 국가시범도시로 선정된 이곳은 약 274만4000㎡ 규모로, 총사업비 3조1636억원을 투입해 교통·주거·건강관리·교육·에너지를 하나로 묶은 미래형 도시로 개발된다. LH와 세종시, KB증권, LG CNS 등이 참여한 민관 합작 특수목적법인(SPC)이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선도지구는 주거 기능 중심의 스마트리빙존(약 17만㎡)과 자율주행·데이터 등 첨단기술을 실증하는 혁신벤처스타트업존(약 16만㎡)으로 나뉜다. 스마트리빙존에는 차량공유와 자율주행, 수요응답형 교통체계(DRT)가 단계적으로 도입되고, 물품 배송·짐 운반을 돕는 생활로봇과 순찰로봇도 단지 내에 운영될 예정이다. 로봇배송을 위한 엘리베이터 연계,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스마트팜, 자원순환 서비스도 계획에 포함됐다. AI 데이터허브와 사물인터넷(IoT), 사이버보안 시스템을 구축해 다양한 생활서비스를 통합 애플리케이션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스마트시티 선도지구의 첫 대규모 주거 공급도 임박했다. BS한양은 오는 11월 합강동 5-1생활권에서 '세종스마트시티 엘 수자인'을 분양할 예정이다. L6·L7·L8·L11 등 4개 블록에 아파트 2191가구와 오피스텔 125실 등 총 2316가구 규모이며, 아파트는 전용면적 84㎡로 단일 구성된다. 블록별로는 L6블록 818가구, L7블록 648가구, L8블록 218가구, L11블록 507가구다. 단지 주변에는 학교 예정부지와 의료·상업시설이 계획돼 있고, 금강과 미호강의 수변환경을 활용한 공원·녹지도 조성될 예정이다.
세종이 행정 기능을 넘어 첨단 제조업과 스마트 인프라를 함께 갖춘 자족형 도시로 전환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기의 역대급 베팅과 스마트시티 본격화는 세종의 산업 생태계와 주거 수요를 동시에 자극하며, 단순 행정수도를 넘어선 복합 거점 도시로의 도약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