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 호황이 세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법인세와 근로소득세가 동반 급증하면서 내년까지 누적 초과세수가 120조원 안팎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투자은행(IB) 업계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여기에 명목GDP까지 대폭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정부가 대규모 지출을 늘려도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현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같은 재정 여력을 단순 현금성 지출에 소진하지 말고 AI 시대를 대비한 인프라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의가 정부 안팎에서 본격화하고 있다. 송배전망,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국가 주도로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핵심이다.
올해 한국의 명목성장률은 주요 IB들 사이에서 대체로 8~10% 수준으로 점쳐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28일 올해 실질성장률을 2.6%로 상향 조정한 데 이어, GDP디플레이터 역시 반도체 가격 상승 효과로 7% 내외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명목성장률은 실질성장률에 GDP디플레이터를 더한 수치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국무회의에서 "올해 명목성장률이 10%에 육박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명목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2002년(11%) 이후 없었던 일로, 올해 달성되면 24년 만의 최고치가 된다.
씨티은행은 내년도 정부 예산 규모를 852조원으로 추산했다.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한 총지출 753조원보다 100조원 가까이 불어나는 규모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들의 법인세 급증과 대규모 성과급에 따른 근로소득세 증가가 세수 호황을 이끌고 있다. 씨티은행은 내년도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을 49.0%로 전망했다. 지출이 대폭 확대되더라도, 그 분모인 명목GDP 역시 함께 커지기 때문에 부채 비율 자체는 지난해 수준에서 유지된다는 분석이다. 당초 올해부터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돌파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명목GDP 확대 효과가 이를 상쇄한다는 것이다.
관건은 이 재원을 어떻게 쓰느냐다. 세종 관가에서는 초과세수를 복지성 지출이나 단순 현금 지원보다 미래 성장 기반 확충에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특히 기본소득처럼 한 번 시작하면 반복 지출로 굳어지는 사업보다, AI 시대에 필수적인 전력 송배전망이나 데이터센터 같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017~2018년 반도체 호황 당시 초과세수를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에 집중했지만 잠재성장률 반등에 실패했다는 반면교사도 이 같은 주장의 배경이 됐다.
정부 내부에서는 보조금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가 신성장 산업에 지분투자 형태로 직접 참여해 성장의 과실을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도 나온다. 6월 발표 예정인 국부펀드 방안과도 연결되는 구상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정부가 단순한 재정지원자를 넘어 미래 산업의 투자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꾸준히 밝혀왔다. 2017~2018년 당시 예산실장을 맡았던 구 부총리는 당시 초과세수 활용의 한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과거 정부 인프라 투자가 성장 기반을 만든 사례로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주도한 광대역통합망(BcN) 구축이 자주 언급된다. 당시 광통신망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후 한국이 IT 강국으로 도약하는 토대가 됐다는 평가다. 정부 일각에서는 이번 초과세수를 AI판 광통신망 투자, 즉 전력망·데이터 인프라 구축에 쏟아부어야 할 적기로 보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가 호황일 때만 반짝 회복되는 현재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살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