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너지기구(IEA)와 합의한 비축유 방출 기한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정부는 여름철 원유 수급 위기에 대비해 비축유를 최후의 카드로 아껴두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양기욱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26일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현재로서는 비축유 방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IEA는 중동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지난 3월 11일, 32개 회원국과 공조해 역대 최대 규모인 4억 배럴의 비축유 방출을 결정했다. 한국에 배정된 방출 물량은 전체의 5.6%에 해당하는 2천246만 배럴로, 오는 6월 9일까지 이행해야 한다.
정부가 방출에 신중한 핵심 이유는 8월 이후 닥쳐올 수 있는 원유 수급 불안이다. 미국과 이란 간 협상이 진전되며 종전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여름철 이후 수급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도 최근 "원유 재고는 줄어들고 있고, 중동에서 새 원유는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여행철 수요는 늘고 있다"며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7~8월에 '레드존'(위험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도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7월까지는 예년 대비 85% 수준의 원유를 확보했지만, 8월 이후 수급 상황은 불투명하다"고 보고했다.
양 실장은 "호르무즈 봉쇄 사태가 이어지면 8월 이후 원유 수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며 "정부 비축유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수단인 만큼, 추후를 위한 카드로 남겨두기 위해 방출을 조금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 비축유는 정유사와의 스와프 방식으로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비축유 스와프는 정유사가 해외 원유 확보 사실을 증명하면 정부가 먼저 비축유를 빌려주고, 대체 물량이 국내에 들어오면 돌려받는 제도다. 양 실장은 "정유사들도 스와프 활용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이번 IEA 공동 방출이 강제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양 실장은 "IEA와의 합의를 가급적 지키려 하지만, 불이행에 대한 페널티는 없다"며 "각국 사정에 따라 대응하면 되고, IEA가 특정 방식을 강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국제 공동 행동에 동참해야 하는 만큼, 정부 비축유를 직접 방출하는 대신 민간 비축 의무량을 줄이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석유사업법에 따라 정유사는 일평균 내수 판매량의 40일 치를 의무적으로 비축해야 하는데, IEA는 이 기준을 완화하는 것도 이행으로 인정한다.
한편, 정부와 정유업계가 호르무즈 봉쇄에 대응해 비중동산 원유 도입을 적극 추진한 결과, 5~7월 비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은 51.5%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해 30.9%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 양 실장은 "중동산 비중이 50% 아래로 내려간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며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해 공급망 다변화를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