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슈퍼사이클이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거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빅테크들이 가격 협상보다 물량 확보를 우선하며 5년 단위 장기계약을 먼저 요청하는 흐름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노무라증권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펀더멘털 대비 심각하게 저평가된 상태라며 주가 재평가가 임박했다고 분석했다.
노무라는 4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투자의견 '매수'를 유지하고, 목표주가도 각각 67만원과 470만원을 그대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두 종목의 주가가 고점 대비 37% 가까이 하락해 2027년 예상 주가수익비율(P/E) 기준 평균 3배 수준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며, 이는 실적 전망 대비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저평가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저평가의 배경에는 글로벌 증시 변동성이 자리하지만, 노무라는 업황 자체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봤다. 메모리 시장은 AI 투자 사이클에 힘입어 전례 없는 수요 강세를 보이는 반면 공급은 구조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노무라는 향후 4년 안에 글로벌 메모리 생산능력이 현재의 두 배인 월 720만 장 규모로, 6년 안에는 세 배인 월 1,100만 장 수준으로 늘어나야만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업체들의 공격적인 증설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전체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며, 공급 부족은 2028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공급 부족이 구조화되면서 메모리 업계의 거래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본 5년 계약에 매년 협상을 통해 계약기간을 1년씩 연장하는 '롤링' 방식의 장기공급계약(LTA)을 확대하고 있으며, 전체 물량의 60~70%를 이 방식으로 고정하는 구조다. 마이크론은 생산능력(CAPA) 자체를 사전 배정하는 전략고객계약(SCA) 방식으로 현재 16건을 체결,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SCA 기반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번 장기계약 확대는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인 빅테크들이 먼저 요청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사양 제품은 공정 난도가 높아 단기 증산이 어렵다는 점이 고객사들의 선제적 물량 확보 수요를 키우고 있다. 빅테크들은 현재 가격보다 최대 20% 높은 상한선을 감수하면서도 5년 단위 계약을 서두르고 있다. 노무라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20~30% 규모의 선급금과 강력한 위약금 조항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공급사에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실적 가시성과 안정성을 보장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원화 강세는 단기 실적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내 메모리 기업들은 매출을 달러로 받지만 비용의 약 20%는 원화로 지출하는 구조여서, 원화 가치가 10% 상승할 경우 영업이익이 약 12% 줄어드는 단기 충격이 발생한다. 이를 반영해 노무라는 SK하이닉스의 3분기 영업이익 추정치를 기존 86조원에서 77조원으로, 삼성전자는 107조원으로 각각 하향 조정했다.
그럼에도 노무라는 환율 악재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메모리 평균판매단가(ASP)로 충분히 상쇄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따른 대규모 무역 흑자가 원화 강세를 유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노무라는 빅테크들의 실제 자본지출 여력이 시장의 우려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을 근거로, 견조한 메모리 수요와 기업들의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이 맞물려 두 종목의 본격적인 주가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