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빅테크, "메모리 확보 전쟁" 돌입…가격보다 중요한 '물량 확보' 장기계약 급증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이 격화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메모리 반도체 구매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과거 단가 인하에 집중하던 고객사들이 이제는 물량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으며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에 앞다퉈 장기공급계약(LTA)을 먼저 요청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가격은 올려도 좋으니 물량부터 확보해달라." 반도체 업계에서 최근 심심찮게 들리는 말이다. 범용 부품 취급을 받아온 메모리가 AI 인프라 확장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는 물론 서버용 D램과 기업용 낸드 SSD까지 동반 공급 부족 현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빅테크, "메모리 확보 전쟁" 돌입…가격보다 중요한 '물량 확보' 장기계약 급증
ⓒ 비즈니스포스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메모리를 얼마나 싸게 사느냐가 관건이었다면, 이제는 원하는 시점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고 전했다. 업계에선 "메모리 업체들이 사실상 '갑(甲)' 위치로 올라섰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수익 구조 자체도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가격 급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고위험 사이클 산업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장기계약을 기반으로 안정적 수익과 현금흐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업계에서는 메모리 산업이 기존의 '선생산·후판매' 방식에서 파운드리(위탁생산)처럼 '선수주·후생산' 체계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UBS에 따르면 최근 메모리 계약은 통상 5년 안팎의 장기 구조로 체결되며, '3년 가격 확정+2년 연장 옵션'이나 '2년 확정+3년 연장 옵션' 형태가 대표적이다. 일부 물량은 가격까지 사전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이뤄진다. 내년 기준 전체 D램 물량의 20~30%, 낸드 물량의 약 20%가 장기계약으로 이동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특히 서버용 DDR5 물량은 이미 60~70%가량이 장기계약으로 소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제조사별 D램 장기계약 비중은 삼성전자 30%, 마이크론 20%, SK하이닉스 18% 수준으로 추정된다.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속도를 내는 빅테크 고객사들이 수년치 공급 물량을 선점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산업 구조의 변화는 메모리 기업들에 대한 증권가의 밸류에이션 재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그간 메모리 반도체는 사이클에 따라 이익이 들쭉날쭉해 주가가 순자산이나 사업 부문 가치 기준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엔 장기계약 확대로 이익 안정성이 높아지면서 영업이익이 온전히 주가에 반영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김운호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장기계약 구조를 보면 장기 물량 배정을 위한 선급금, 현재 가격에 연동된 분기별 가격 협상 등 과거 사이클에서 보기 어려웠던 조건들이 등장하고 있다"며 "AI 인프라 확산으로 D램 시장에서 공급 안정성과 물량 확실성이 최우선시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UBS도 "시장이 마이크론 주식에 보다 정상적인 밸류에이션 배수를 부여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AI가 메모리 산업 전반에 가져온 구조적 변화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재평가는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마이크론의 증권사 목표주가는 최근 3배 가까이 상향 조정됐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주가 반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HBM도 이 같은 구조 변화를 상징하는 제품으로 꼽힌다. AI 서버에는 기존 서버 대비 훨씬 많은 HBM과 고용량 D램이 필요하지만, 첨단 패키징과 미세 공정 생산능력 확대 속도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 차세대 AI 가속기를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빅테크 간 선점 다툼은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씨티증권은 올해 4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평균판매가격(ASP)이 전 분기 대비 약 30%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주력 제품인 HBM3E는 지난해 D램 가격 흐름이 반영된 계약이 많지만, 올해 하반기 공급이 본격화될 HBM4부터는 최근 급등한 D램 가격이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번 주 인기 글

NEWS

댓글 쓰기

💬 욕설 및 비방, 홍보성 댓글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됩니다.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