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팹 1기당 최소 60조~150조 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생산시설이 광주·전남에 최대 4기 들어선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 2기씩 메모리 팹을 구축하는 이번 투자는 10년간 최대 800조 원 규모로,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기지를 남부권으로 분산하는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하고, 삼성그룹과 SK그룹 총수와 함께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공식화했다. 정부는 "전남광주특별시를 서남권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며 삼성 2기·SK 2기 등 메모리 팹 4기 구축 계획을 밝혔다. 전력·용수 등 핵심 인프라는 정부가 직접 책임 공급하고, 인허가부터 부지·건축까지 기업과 협력해 생산능력을 신속히 확충하겠다는 약속도 함께 나왔다.
이번 투자의 구체적인 후보지로는 광주 북구와 전남 장성군에 걸쳐 조성 중인 362만㎡ 규모의 첨단3지구와 전남 해남의 솔라시도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첨단3지구는 광주과학기술원(GIST)·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연구개발 인프라와 가깝고, 국가 AI 데이터센터와도 연계가 가능한 데다 내년 9월 신장성 변전소(3GW 처리 가능)가 준공되면 전력 수요도 안정적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해남 솔라시도는 396만㎡ 부지에 9.8기가와트(GW) 규모의 재생에너지 공급이 가능하고, 영암호·금호호 등 주변 수계에서 하루 100만 톤의 산업 용수를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공정 팹 유치 후보로 부각된다. 다만 부지의 88% 이상이 간척 매립지여서 지반 보강 공사에만 2,600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는 점은 과제로 남는다.
호남이 이번 투자의 최적지로 부상한 데는 AI 시대의 달라진 입지 공식이 작용했다. 과거 반도체 공장 입지 결정의 핵심이 인력과 협력업체 생태계였다면, 이제는 대규모 전력의 안정적 공급과 RE100 대응 능력이 기업의 최우선 조건으로 떠올랐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가 공급망 전반에 재생에너지 100% 조달을 요구하면서 삼성·SK의 입지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전남은 태양광발전량 전국 1위, 해상풍력 잠재력 전국 최대 수준을 갖춰 RE100 이행에 유리한 조건을 보유하고 있다. 2023년 산업통상부 국가첨단전략산업 공모에서 광주·전남이 최우수 등급을 획득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수도권 용인 클러스터가 2030년대 중반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점 역시 호남 입지론에 힘을 실었다. 수도권과 충청권에는 산업 수요가 집중되면서 전력 공급과 송전망 부담이 갈수록 커지는 반면, 재생에너지 생산지 인근에 반도체 공장을 배치하면 전력 수급 불균형을 동시에 해소할 수 있다는 논리다. 광주에는 앰코코리아 등 후공정 생태계가 이미 구축돼 있고, AI 데이터센터와 광산업 기반도 갖춰져 있어 산업 허브로서의 기초체력도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투자가 현실화되면 산업 생태계 전반의 연쇄 변화가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앵커기업이 자리를 잡으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들이 대거 이전해오고, 자동차·에너지 기업들도 반도체 생태계로 기술 전환을 시도하는 등 전방위적인 산업 고도화가 뒤따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 시행령은 비수도권 신규 클러스터의 전력·용수·도로 기반시설 구축비용 전액 지원 근거를 담고 있어 초기 투자 부담을 대폭 낮출 수 있는 기반도 마련돼 있다.
광주·전남에서 반도체 유치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22년 9월, 강기정 광주시장과 김영록 전남지사가 민선 8기 상생 1호 사업으로 반도체 특화단지 공동 유치를 선언한 시점이다. 이후 최대 1000만㎡ 규모의 용지 확보와 풍부한 용수·전력 조건을 내세워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약 4년의 시간이 흐른 끝에, 새 정부 출범과 전남광주특별시 통합 원년이 맞물리며 국가 차원의 반도체 생산기지 조성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다만 초대형 투자에 따른 전문 인력 양성 방안과 환경적 수용성 확보는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지목된다. 국회 산자위 정진욱 의원은 "광주·전남은 반도체 팹의 기본 조건인 전력·용수·인재를 모두 갖춘 곳"이라며 "단순 제조기지가 아니라 설계, 제조, 패키징, AI 실증이 연결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해 국가 균형발전과 산업 안보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문영 의원도 "반도체 팹은 연구 기관과 협력 기업, 양질의 일자리, 청년 인재가 함께 모이는 미래산업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라며 국회와 정부, 산업계의 공조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