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의 한 소형 아파트 전세 매물에는 이색적인 조건이 붙어 있다. '1990년 이후 태어난 30대 초반 신혼부부'만 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인 가구나 40대 부부는 받지 않겠다는 집주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올수리된 매물인 만큼 집을 깨끗하게 쓸 임차인을 직접 고르겠다는 것"이라며 "매물 자체가 귀하다 보니 이런 조건도 이해한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이 1년 새 절반 가까이 줄면서 집주인들의 협상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다. 단순한 전월세 가격 인상을 넘어, 세입자를 선별하거나 기존 임차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례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아실에 따르면 22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1만5316건으로 1년 전(2만7499건)과 비교해 44% 가까이 줄었다. 월세 매물도 1만9753건에서 1만4841건으로 감소했다. 집을 구하는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큰 월세 물건마저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수급 불균형은 지표로도 확인된다. KB부동산이 집계한 올해 3월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172.41로, 2021년 9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매물을 직접 보지도 않고 계약부터 하는 이른바 '노룩 계약'도 늘고 있다는 게 현장 중개사들의 전언이다.
가격 흥정도 갈수록 집주인 쪽으로 기울고 있다. 소형 아파트 월세 계약을 추진하던 한 세입자는 가계약금을 입금하기 직전 집주인이 갑자기 "월세를 5만원 올려달라"고 요구해 계약이 무산됐다.
집값 상승과 맞물려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토지거래허가제 시행으로 임차인이 있는 매물은 다주택자만 거래가 가능하고 절차도 번거로운 탓에, 일부 집주인들은 공실로 비운 뒤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관악구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최근 갱신 청구권이 남은 세입자에게 '자녀가 들어와 살 예정'이라고 통보한 집주인이 있었다"면서 "실제로는 집값이 오르자 공실 상태로 팔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전했다.
노원구에서 20년 가까이 영업해 온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5살짜리 아이를 둔 부모가 계약을 원하자 '아이가 있으면 집이 상한다'며 거절한 집주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해당 계약은 중개사가 집주인을 수차례 설득한 끝에 겨우 성사됐다.
업계에서는 토지거래허가제 확대 등으로 임차인 있는 매물 거래가 더 줄면서 세입자의 어려움이 심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집주인들의 배짱 호가와 함께 전세가격이 이전 최고점을 뛰어넘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며 "임대인 우위가 강해지면서 보유세 등 각종 세금을 임대료에 전가하려는 움직임도 확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